요즘 시사 뉴스를 훑다가 문득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판결문을 읽는 재판부의 판단과, 그 판단을 둘러싼 증거의 신빙성 문제가 연일 화제가 되는 걸 보면서다. 나는 크래프트를 정리하고 분류하는 걸 취미로 삼는 사람이라, ‘증거’라는 단어에 유독 민감하다. 물건이든, 진술이든,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아닌지 가려내는 일은 결국 큐레이션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서랍 한 칸을 열어 재료를 늘어놓고, 쓸 것과 버릴 것을 나누는 그 손놀림이 어쩐지 판결문을 읽는 일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둘 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흘려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현상은 이렇다. 재판에서 결정적이라 불리는 증거가 있는데도 법원이 그 진술의 신빙성을 낮게 본다는 판단이 나오고, 그 판단을 두고 다시 상급심에서 다툼이 벌어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증거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다. 사람의 기억과 진술은 원래 흔들리고, 그 흔들림을 어떻게 다룰지가 재판의 핵심이 된다. 이 대목은 한겨레의 관련 보도에서도 짚고 있듯, 재판부가 어떤 증거를 언급하고 어떤 증거를 흘려보내는지가 판결의 무게를 좌우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실제로 판결문을 들여다보면 같은 사실관계를 두고도 1심과 2심의 서술 밀도가 사뭇 다르다. 어떤 법관은 진술의 앞뒤 맥락을 한 줄 한 줄 뜯어보고, 어떤 법관은 전체 인상으로 요약한다. 그 차이가 곧 신빙성 판단의 차이로 굳어지고, 그 판단이 다시 상급심에서 흔들린다. 증거의 양이 아니라 증거를 다루는 손의 결이 결과를 바꾸는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 통계를 떠올려 본다. 무죄율이나 항소심 파기율 같은 지표는 해마다 조금씩 움직이지만, 그 숫자 뒤에는 ‘증거를 얼마나 신뢰했는가’라는 정성적인 판단이 겹겹이 깔려 있다. 숫자는 결과를 말해 주지만 과정은 말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판결문의 문장을 읽는 일이 중요해진다. 몇 개의 증거가 인용되었는지, 어떤 진술이 배척되었는지, 그 배척의 이유가 얼마나 구체적인지. 이 세 가지를 세어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판결이 얼마나 성실하게 쓰였는지 가늠하곤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문외한의 독법이다. 그런데 그 문외한의 독법이 때로는 여론의 방향을 만들고, 그 여론이 다시 법정의 긴장감을 높인다.
원인을 곱씹어 보면, 결국 우리 사회가 ‘검증’이라는 단어에 점점 더 예민해졌기 때문이다. 정보가 넘치고, 그 정보를 요약해 주는 도구까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원문과 요약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법정도 예외가 아니다. 진술 하나, 녹취 하나, 메시지 한 줄이 판결의 방향을 바꾸는 시대에, 그걸 해석하는 인간의 판단은 여전히 느리고 주관적이다. 나는 이 간극이 흥미롭다. 기술은 빠른데 판단은 느리다. 그 느림이 때로는 안전장치고, 때로는 답답함이다. 요약 도구가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을수록, 우리는 다듬어지기 전의 거친 원문을 읽는 근육을 잃어 간다. 법정에서 요구되는 것은 매끄러운 요약이 아니라, 흠집투성이 원문을 견디는 인내다.
사례를 하나 떠올려 보자. 예전에 내가 정리하던 공예 재료 상자를 생각한다. 같은 색 실이 두 뭉치 있는데, 하나는 오래된 것이고 하나는 새것이다. 라벨이 없으면 나는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데 누군가 ‘이게 진짜다’라고 말해 주면 순간적으로 믿게 된다. 재판에서의 진술 신빙성 문제도 이와 닮았다. 라벨이 붙은 정보는 믿고, 라벨이 없는 정보는 의심한다. 문제는 그 라벨을 누가 붙이느냐다. 라벨을 붙이는 사람이 권위를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라벨 자체를 검증하지 않는 습관에 젖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복잡한 사안일수록 전문 자문이 필요하다면 성범죄전문변호사 같은 곳을 참고해 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법률가가 아니라서 판단은 못 하지만, 적어도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다르다고 믿는다. 질문을 아는 사람은 답을 검증할 수 있고, 질문을 모르는 사람은 답을 소비할 뿐이다.
여기에 AI가 끼어드는 순간 문제는 한 겹 더 복잡해진다. AI는 라벨을 붙이는 데는 능숙하지만, 그 라벨이 왜 붙었는지 설명하는 데는 서툴다. 방대한 판례를 학습해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 내지만, 그 문장이 어떤 근거의 사슬로 이어지는지는 종종 생략한다. 사람이 요약본을 믿는 이유와, 법관이 진술을 믿는 이유는 다르다. 전자는 편의이고 후자는 책임이다. 편의는 검증을 미루게 하고, 책임은 검증을 요구한다. AI가 판결을 흉내 낸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 문장이 맞느냐’가 아니라 ‘이 문장을 누가 책임지느냐’일지도 모른다. 흉내는 결과를 낼 수 있지만 책임을 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망은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보고 싶다. 앞으로 재판과 여론, 그리고 기술이 뒤섞이는 장면은 더 자주 등장할 것이다. AI가 요약하고, 사람이 판단하고, 다시 그 판단이 검증되는 순환 구조 속에서 중요한 건 결국 ‘근거를 설명할 수 있는가’다. 증거가 결정적이라고 말하려면 왜 결정적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설명이 납득되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증거도 힘을 잃는다. 이건 법정만의 규칙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기사를 읽고 ‘그렇구나’ 하고 넘길 때, 나는 스스로에게 한 번 묻는다. 이 문장의 라벨은 누가 붙였는가. 그 라벨을 떼면 무엇이 남는가. 오늘도 나는 재료 상자를 정리하며 생각한다. 라벨보다 중요한 건, 그 라벨을 붙인 이유를 기억하는 일이라고.